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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무늬 - 이은규 흘러간 구름의 당신과 흐르고 있을 구름의 무늬를 듣기 위한 질문이 같다 구름아, 전생을 누구에게 걸까 나는 종종 거의 실행되었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가로막힌 하늘 앞에서 몇 점 색으로 찢겨져 나온 구름의 나선 약처럼 같은 질문에 다르게 대답해야만 할 것 도처에 기저 눈물들이 고요하고 왜 예감은 너무 일찍 혹은 아주 늦게 도착하는 걸까 지나간 무음을, 구름의 무늬에게서 미리 듣는 방 2021. 6. 19.
눈사람 자살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2021. 6. 19.
우리는 서로에게 - 문태준 우리는 서로에게 환한 등불 남을 온기 움직이는 별 멀리 가는 날개 여러 계절 가꾼 정원 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 풀에게는 풀여치 가을에게는 갈잎 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 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 날마다 석양 너무 큰 외투 우리는 서로에게 절반 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2020. 8. 4.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 이기철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지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추잎처럼 비출 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깬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 만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 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 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은 때.. 2020.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