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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상념

누군가가 신경쓰여 잠도 안 온다는 감정에 대하여

by 피어나는 2018. 5. 10.

그제 퇴근길에 왠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우리 아파트 단지 안을 헤매면서 지하철을 타러 어디를 가야 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이 아파트를 뚫고 공원을 건너가면 지하철이 나온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상상이 안된다는 얼굴이셨다.


가만히 살펴보니 할아버지는 길을 잃어 약간 정신적 탈진 상태처럼 보였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어쩔 줄 모르겠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내가 어디로 가시려는 거냐고 물어보니 방어적인 태도로 서울로 갈거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그러면 제가 지하철 타러가는 길 알려드릴테니 저 따라오세요. 할아버지는 같이 가주겠다는 말에 미심쩍어하면서도 따라오셨다. 이 아파트 사람들은 이렇게 불편해서 출퇴근을 어떻게 해요. 정말로 걸어서 지하철 타러 갈 수 있단 말이에요? 할아버지는 하소연했다.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같이 지나가면서 할아버지는 비로소 내가 맞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당신 얘기를 막 하셨다.


떡값 받으러 왔어요. 우리집 떡이 만칠천원인데, 그거 배달하려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여기까지 만칠천원짜리 떡을 배달하러 오셨다니 차비 빼면 아무것도 안남으시겠다고 생각하다가, 할아버지 나이쯤이면 지하철이 무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버스를 타고 배달오셨다고 했다. 인건비 제하면 남는게 없어보이는 떡배달을 하러 이 먼곳까지 와서 길까지 잃어버린 할아버지가 짠했다.


아파트를 지나서 길을 따라 쭉 가시라고, 저쪽부터는 사람들도 많을테니까 지하철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다들 알려줄거라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모자를 벗으며 인사하시고는 길을 따라 사라지셨다. 할아버지는 지친 걸음을 열심히 움직이면서 집을 향해 가셨다.


나는 왠지 마음이 안놓여서, 할아버지가 제발 지하철을 잘 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끝까지 따라갈까 고민하며 쳐다보다가, 호의가 지나치면 도리어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달팽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달팽이는 어제 밤 물을 마시려고 싱크대에서 꺼낸 컵에 달라붙어 있었다. 밭에서 캐온 고구마에 딸려왔나봐. 이모가 그렇게 말해서 나는 우선 큰 양배추 이파리 위에 달팽이를 놓아주었다. 달팽이는 곧장 양배추 잎을 먹기 시작했다. 귀 기울이니 따각따각 섬유질 끊어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서 알 수 있었다. 


자기 직전에 다시 확인했더니 달팽이는 양배추 이파리 밑으로 들어가 숨어있었다. 그걸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화단에 놓아줘야지, 생각하고서는 잊어버리고 출근했었기 때문에, 오늘 밤에라도 놓아주어야 했다. 


하루사이 다 시들어 흐느적거리는 양배추 이파리 밑에 여전히 숨어있는 달팽이를 들고 화단에 놓아주고 돌아오면서 나는 또 달팽이가 저기서는 잘 살려나 걱정하고 있었다.


밤에 자리에 누워서도 오늘 내가 도와준 할아버지와 달팽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걱정되고 신경쓰이고 안쓰러워서 잠도 안오고 초조해하는 사람들을 그렇게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혼자서 뭔가를 한다고 했을 때, 어련히 잘 할 사람인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안쓰럽고 애틋하고 신경이 쓰여서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 조초해하면서 그 사람을 계속 생각하면서 동동대는 사람이 신기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그만하면 충분히 잘 할 사람들에 대해 머리로는 내가 할만큼 했다는 것을 알아도 그 할아버지가 그래서 집에 잘 들어가셨을까, 많이 지쳐보이셨는데. 그 달팽이는 밭에서 온 아이일텐데 아파트 화단이 괜찮을까. 마음이 계속 거기로 향하고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어 신경이 쓰였다. 


문득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신경쓰여 잠이 안 온다는 말은 이런 뜻이었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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