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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상념

2018년의 절반을 돌아보며.

by 피어나는 2018. 6. 26.


이번 학기도 무사히 끝났다. 


한 학기가 끝나니 비로소 반년이 흘렀구나 생각이 든다. 학기가 있어 좋은 것은 시간이 마냥 정신없이 흘러가는게 아니고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다. 어쩌면 내가 그럴 여유와 성숙함을 익힌 것일지도.


기출 족보 찾으라고 서칭하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표와 강의 후기를 볼 수 있었다. 몇몇 과목들 꽤 재미있어 보였다. 그런데 나는 벌써 다음 학기에 졸업이라 아쉬웠다. 이 짓을 할 때마다 스트레스 받아하면서 왜 아쉬운건데. 나도 내가 너무 웃기다.


꿈이 있다는 게 사람을 설레게 해서 참 좋은 거다. 왜 하는지, 어디로 갈 수 있는 건지 방향을 알지 못한 채 주어진 일만 할 때는 무기력하고 두려웠다. 그런데 어쩌면, 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삶에는 반짝하고 별이 생겨난다. 마음에 불이 들어오던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런 나 자신에게 신기함을 느끼던 기분도. 그제서야 내가 무기력에 빠져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 때도 허투로 일하지 않았다. 성실이라는 단어가 고과에 오르던 나였다. 그래서 나에게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 것과 무기력은 별개일 수 있더라. 그러니까 그냥 살아있으니까 살아간다는 게 그런 거였다. 


3월부터 실험 중인게 하나 있다. 달력에 나라는 사람을 알기 위한 기록을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구나, 알 수 있는 기록. 거기에 아주 작은, 자기계발 이런 것과는 다른,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습관 몇개를 기록 중이다. 


연초에 나는 아주 우울했다. 왜 그렇게 슬펐는지 몰라. 슬슬 또 그 놈이 내 목을 조르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문득 궁금해졌었다. 정말 내 인생은 우울한가. 내 삶의 우울의 빈도는 정말 날 죽일만큼 잦을까. 


일기 따위를 쓰기는 싫었다. 나를 먹는 어두운 감정을 구구절절히 적고 싶지 않았다. 쓰면서 늪에 더 침잠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내 인생 속 우울의 지분율이 궁금했으니까, 나는 세줄 일기를 써보았다. 짧게, 하루에 가장 우울했던 일과 기분 좋았던 일, 목표를 쓰는 그건 정말 효과가 좋았다. 


그날 나를 좀먹은 여러개의 우울들 중에 하나만 쓰기 위해서 나는 그것들에게 중요도를 매겨야 했다. 이정도는 괜찮아, 이건 솔직히 중요하지 않은 걸 아니까. 그게 나를 좀 더 차분하게 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너무나 힘들었는데도, 막상 일기장을 펼치니 무엇이 우울했던건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날은 생각보다 빈번했다. 


기쁨을 적는 것은 우울을 적는 것 만큼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마냥 싫은 것만 있었던 게 아닌 걸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좋았다. 어거지로라도 찾아서 써넣으려 했다. 훗날의 나에게 그래, 기쁜 것들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우울이 내 생각만큼 삶을 지배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기까지 한달 정도 걸린 것 같다. 일기장을 붙잡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기간이 생기고, 세줄 일기를 치웠다. 그리고 중간에 같이 했던 달력의 기록만 계속했다.


이 글을 적으며 책상 위의 달력을 3월로 남겨보니, 그때 얼마나 우울하고 무기력했는지 다시 느껴진다. 그리고 얼마나 발버둥쳤었는지도. 그 당시 우울한 날에는 울고 있는 스티커를 붙였었다. 한주가 우는 스티커로 꽉 채워진 날도 있다. 달력에 체크할 습관을 정하면서, 거창한 자기계발 습관 같은 건 배제했다. 그건 나를 몰아세울 뿐, 일으켜세우진 못할 느낌이었다. 대신 나를 오직 기분좋게 해줄 가볍고 작은 습관을 찾아보았다. 


나는 매일 아침 이불정리를 습관으로 골랐는데, 어느 유투브 영상의 영향이었다. 미해군 사령관인 사람이 졸업 축사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고 했다. 매일 아침 이불 정리를 하라고 했다. 


If you make your bed every morning, you will have accomplished the first task of a day. It will give you a small sense of pride and will encourage you to another task. And another, and another.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믿고 싶었다. 아침에 이불 정리만 해도 그 날의 첫번째 할일을 해낸 것이다. 눈 뜨자마자 나는 그날의 할일 중 하나를 끝낼 수 있다.


If by chance you have a miserable day, you will come home to a bed that is made. That you made. And made bed gives you encouragement, that tomorrow will be better.


That you made. 저 말이 왜 그렇게 나에게 크게 다가왔는지 몰라. 마치 그 사람이 나에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저 한마디를 굉장히 단호하게 명령하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비참한 하루가 지나고 단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패배감에 젖어 돌아왔을 때 아침에 잘 정리하고 나갔던 침대를 본다면. 그래도 내가 저 침대 하나라도 제대로 정리했구나. 잘 한게 저거 하나라도 있구나. 누군가는 그 침대 하나에 무슨, 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절박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And made bed gives you encouragement, that tomorrow will be better.


3월 5일부터 이불정리 한 날마다 달력에 체크를 했다. 달력에는 '나를 잘 챙겨보자' 라고 써놓았다. 첫 한달은 잘 되지 않았다. 절반 정도. 그게 뭐라고,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를 위해 뭔가 힘내서 한다는 게 말이야. 군데 군데 텅빈 3월의 기록은 지금도 내 가슴을 훅 뚫고 들어온다. 그 빈 공간이 나의 우울이었던 것 같아서. 그것 하나가 그렇게 어려웠구나 싶어서.


4월에는 3월보다만 많이 하자, 라고 생각했었다. 4월의 절반이 지나가면서 이불정리가 정말 효과가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이불을 그냥 잘 덮어놓기만 했는데(이불정리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음으로), 점차 나름의 요령과 방법을 알게 되고 나중엔 베개와 쿠션으로 데코까지 했다. 그러자 그렇게 정리된 침대 위에 다시 눕지 않게 되었다. 일어나는 순간 이불정리를 하는 것은, 이제 이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선언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무의식 중에 그렇게 받아들인 나는 아침에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 없어졌다. 


침대가 정리되자 자연스레 다른 곳도 정리하게 되었다. 마치 깨진 유리창 효과를 몸으로 체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나를 돌봐주고 있었다. 정리된 방은 내가 무엇인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퇴근 후에 지쳐서 돌아와 깨끗한 방을, 내가 직접 그렇게 만든 방을 보면 마음이 치유되었다.


5월, 달력에 매번 적던 '나를 잘 챙겨보자'라는 문장에 '게으름, 귀찮음, 무기력을 이겨내자'라는 문장이 추가되었다. 나는 무언가 힘을 내고 있었다. 나를 밀어주는 동력이 있었다. 방청소를 한 날이나 책을 읽으면 그것도 적었다. 나를 칭찬해주기 위해서였다. 이불정리하는 날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서 그런 나를 칭찬하는 문장도 적었다. 


6월에는 이불정리는 매일 하는 습관으로 자리잡았고, 추가로 기상 시간을 적기 시작했다. 업무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취침과 기상시간이 꽤 불규칙하다. 새벽까지 일하는 날도 흔해서 무조건 아침 일찍 일어나기를 수행하는 건 스스로를 괴롭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냥 나를 잘 돌봐주고 싶었다. 조금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래서 대신 매일 기상 시간을 적으며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의 패턴은 어떠한지, 어떤 하루를 시작하는지 들여다보는 걸로 시작하여 지치지 않을 계획을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대략 한달쯤 적어놓고 보니 정말 대박 불규칙하다. 아침 6시부터 14시까지 널을 뛰는 기상 시간을 그래도 수렴한다면 8시~8시 반 정도로 맞춰진다. 여기서 한시간만 당겨서 꾸준히 일어나게 한다면 업무에 무리없이 습관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취침 시간을 안 적었던게 좀 아쉬워서 7월에는 그것도 적어보려고 한다. 그러면 과연 얼마나 밤을 새우는지도 알 수 있겠지. 


달력에 점점 많은 것들이 채워진다. 3월의 황량했던 달력과 비교하면 바쁘고 계획에 차 있다. 아마 내 마음에도 많은 것들이 채워지고 있는 거겠지. 다음 달에는 뭘하고, 올해까지는 뭘하고, 내년부터는 뭘 시작해야지. 이런 계획이 있다는 게 재미있다. 사실 이런 계획은 종종 세웠지만 재미있게 느낀 적은 없었다. 언제나 부담이었고, 두려움 때문에 하는 일이었다. 즐겁게 재미로 나를 몰아가는 것, 아니 이끌어가는 것, 돌보아 주는 것. 그런 것을 알아가고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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