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올빼미46 눈사람 자살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2021. 6. 19. 우리는 서로에게 - 문태준 우리는 서로에게 환한 등불 남을 온기 움직이는 별 멀리 가는 날개 여러 계절 가꾼 정원 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 풀에게는 풀여치 가을에게는 갈잎 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 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 날마다 석양 너무 큰 외투 우리는 서로에게 절반 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2020. 8. 4.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 이기철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지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추잎처럼 비출 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깬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 만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 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 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은 때.. 2020. 4. 10. 상처 - 이승하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어디론가 가는 광경을 어린 시절 본 적이 있다 산 군인이 죽은 군인을 업고 비틀대며 가는 장면을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상처 입은 자는 알 것이다 상처 입은 타인에게 다가가 그 상처 닦아주고 싸매주고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상처입힌 자들을 향해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를 상한 개가 상한 개한테 다가가 상처 핥아 주는 모습을 나는 오늘 개시장을 지나가다 보았다 2020. 4. 4. 이전 1 2 3 4 5 ···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