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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올빼미46

뼈아픈 후회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 2019. 2. 4.
고요한 세상 - 제프리 맥다니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의 눈을 더 많이 들여다보게 하고 또 침묵을 달래 주기 위해 정부는 한 사람당 하루에 정확히 백예순일곱 단어만 말하도록 법을 정했다 전화가 울리면 나는 '여보세요'라는 말 없이 가만히 수화기를 귀에 댄다 음식점에서는 치킨 누들 수프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나는 새로운 방식에 잘 적응하고 있다 밤 늦게 멀리 있는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스럽게 말한다 오늘 쉰아홉 개의 단어만 썼으며 나머지는 당신을 위해 남겨 두었다고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나는 그녀가 자신의 단어를 다 써 버렸음을 안다 그러면 나는 '사랑해' 하고 천천히 속삭인다 서른두 번하고 3분의 1만큼 그 후에 우리는 그냥 전화기를 들고 앉아 서로의 숨소리에 귀 기울인다 2018. 6. 26.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이제니 그래 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 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 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 2018. 5. 10.
강에서 - 한상철 가만히 있는 세상 속을내가 헤집고 다니는지가만히 있는 내 속을세상이 와서 헤집는지매일 해가 뜨는지해는 가만 있는데 내가 뜨는지더 알 수 없는 것은그 많은 꽃을 피었다 사라진 후흰 눈송이들 왜 오는지 그 동안바다로 흘러간 강물들 모두어디 모여 있는지그 강물에 섞여간사람들다들 잘 있는지오늘은 너에게 묻는다 2018. 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