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5

막막함이 물밀듯이 - 이승희 이 막막함이 달콤해지도록 나는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모른다. 헛된 예언이 쏟아지도록 나의 혀는 허공의 입술을 밤새도록 핥아댔다. 막막함이여 부디 멈추지 말고 나의 끝까지 오시길, 나의 온몸이 막막함으로 가득 채워져 투명해질 때까지 오고 또 오시길 나 간절히 원했다. 나는 이미 꺾였으니 물밀듯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길. 그리하여 내게 남은 것은 나뿐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미 낡아버린 루머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내 몸속에 새겨주시길. 내 피가 아직도 붉은지 열어보았던 날 뭉클뭉클 날 버린 마음들을 비로소 떠나보냈듯이 치욕을 담배 피우며 마음도 버리고 돌아선 길이 죽고 싶다는 말처럼 깊어지도록 밀려오시길. 막막함으로 밥 먹고 사는 날까지. 2018. 1. 20.
하루살이와 나귀 - 권영상 해 지기 전에한 번 더 만나줄래?하루살이가 나귀에게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안 돼.내일도 산책 있어.모레, 모레쯤이 어떠니? 그 말에 하루살이가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섭니다. 넌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2018. 1. 20.
인공위성Y - 서덕준 네 동공의 궤도를 돌고 있는 나는너를 추종하는 위성이야 너의 살갗을 맴돌 뿐인데내 마음에선 왜 꽃덤불이 여울져?네 앞에서 나는 왜 언어를 잃어버려? 네가 공전하는 소리는 나를 취하게 해아득하게 해 나는 허파를 잃어버리지이렇게 너의 숨소리는 참으로 달콤한 환청이야 이봐, 보고 있다면 나를 좀 구해줘네게 한 걸음을 못 가 헐떡이는 너의 위성을 2018. 1. 20.
추위에 대하여 - 이성미 네가 올 때마다 육각형 눈이 와. 나는 여름 들판에서 너를 기다려. 하얀 별들이 밤하늘을 뒤덮고, 나의 심장에도 차가운 눈이 내려. 너는 새벽에서 이곳으로 와. 빈방에서 여름으로 와. 그럴 떄 너는 너보다 커 보이거나 작아 보여. 그림자놀이처럼. 침엽수에게 어떤 모양의 잎을 달고 싶으냐고 물으면 흰 왕관처럼 얹힌 눈이 녹아버릴까. 북쪽 여왕의 반대말은 북쪽 왕인가 남쪽 여왕인가 남쪽 허름한 소녀인가 소년인가. 이런걸 궁금해하면 네가 화를 낼까. 담요를 드릴까요. 물어보면 네가 조금씩 녹을까. 녹으면서 허둥댈까. 너는 하얀 자동차를 타고 한 방향으로 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나라로. 눈보라가 치고 침엽수가 자라는 빈방 속의 빈방으로. 나는 옆구리나 심장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너.. 2018.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