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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올빼미

소년이 온다

by 피어나는 2018. 4. 21.



소년이 온다는 그 시절의 거짓과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역사적 사명감보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투성이의 모습, 트라우마의 전달에 가깝다.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태도로 받아들어야 하는가.


소설은 전개가 불친절하다. 

인물의 회상 속에서 진행되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대사와 서술의 구분이 없고, 챕터마다 화자가 바뀌지만 인물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일인칭 시점이라 상황설명도 부족하다. 숭덩숭덩 넘어가는 의문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퍼즐을 맞춰야 한다. 


시작은 광장 발포 이후 도청 대치 전까지의 상황이다. 주인공 소년 동호는 광장 발포 때 실종된 친구를 찾으러 상무관에 갔다가 사망자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사망자를 수습하고 유족을 안내하는 누나들, 태극기나 양초 등 시신 관리용 물품을 구해주는 형 등 여러 인물이 스쳐지나간다. 이후로는 이 때 동호가 상무관에서 만났던 인물들이 차례로 화자로 등장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작품은 내내 일인칭이고, 정보는 제한적이다. 인물들은 그 시절의 트라우마를 안고, 자신을 숨기며 살아간다. 스스로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기를 두려워한다. 기억은 한겹 물 아래에서 어른거리며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입 밖으로는 커녕, 속으로조차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도 기억은 불쑥 불쑥 삶을 침략한다. 끼니마다 찾아오는 식욕이 혐오스러워질 정도로. 삶의 본능을 치욕으로 느끼면서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되묻는다. 


나는 왜 살아서 여기 있지. 너는 왜 죽어야 했지. 그 때 손을 놓쳤던 것을, 도망가라고 말 못한 것을, 숨이 꺼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던 것을 평생 후회하면서, 개인의 잘못으로 치환하여 가슴을 반복해 후비면서, 살아남은 후에도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해야 했던 일들이 떠오르고, 벌레였던, 걸레였던 기억에 몸을 떨다가, 너는 그 계절을 지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반복하다 망가진다.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에 섞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이제 없다. 유리같은 그들의 영혼은 이미 깨져버렸다. 그렇게 부서지며 그들이 인간임을, 영혼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산화하였다.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에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거야.



그 때 군화발에 짓밟히면서도 사람들은 계속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다. 소설의 초입, 상무관에서 태극기를 공수받으며 동호는 묻는다.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거냐고.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냐고. 입관이 치뤄지며 애국가가 돌림노래처럼 여기저기서 흐느껴 흐를 때, 숨죽여 들으며 거기서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보려던 동호처럼 나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관 위로 덮이는 태극기. 장송곡 대신 불린 애국가. 끝내 총도 쏘지 못했으면서 도청에 남은 사람들. 죽을 걸 알면서도 거기 남았던 사람들. 모르겠다고,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는 그 사람들이 그 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감정은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원해서. 짓밟힐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마주하고자 그랬다. 똑바로 보려고, 당신이 밀어붙이는 그 모든 것들에 속수무책으로 파괴당할지라도 최소한 두려워 등돌린 채 죽지 않으리라. 마지막 순간까지 눈 뜨고 있는 한, 날 죽이러 오는 당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한, 당신이 남기고 가는 핏자국 하나 하나에 저항의 흔적을 남기는 한 우리는......


태극기를 두름으로써 나를 죽인 것이 국가가 아니라고, 그들은 국가가 아니라고 항의했다.

애국가를 부르며 빨갱이가 아니라고, 무고한 시민이라고 항의했다. 

언제라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시간은 무정하게 지나고 그 때의 치열함은 그 때에 남고, 이제 남겨진 사람들이 고통을 상속하였다. 그 시절이 그렇게 그저 지나가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견딜 수 없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은 끝난다. 견딜 수 없어서 끝내 죽는 자. 잊으려는 자. 기록하려는 자. 각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그 묘지에 소년이 온다. 그 밤의 발소리로 소년이 온다. 

이제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가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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