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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올빼미

죽음의 수용소에서

by 피어나는 2018. 4. 21.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읽고 싶었던 책은 <죽음과 함께 춤을>이었다. 제목이 생각이 안나서 검색하다 이 책이 내가 찾는 책인가...? 하며 확인 차 읽게 되었다.비밀독서단에도 나왔던 책이라더라.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나더라니 유명한 책이었던 거다.


수용소 생활은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 근근히 버티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전쟁 말기 3년 가까이 수용소에 있었다. 건강한 사람이 정신도 육체도 붕괴되어 짐승처럼 되기까지는 3년이면 충분한, 사실은 3년까지도 필요 없는 것이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그렇다해도 놀랍게도, 그 안에서도 사랑은 죽지 않았다. 생존에 필요한 원시적 행동 이외 에너지를 소모할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저자는 작은 호의 한번, 농담 하나의 가치를 확인했다. 그런 작은 것들이 마음에 온기를 채워주어 버티게 했기 때문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사람은 도리어 운명론자가 된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다 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단계를 벗어난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연한 손짓 한번, 이유 모를 감정으로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릴 때 그것을 운명의 부름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정한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목숨이 장난처럼 다뤄지는 환경에서 운명의 장난을 여러번 목격했기에.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무감각하게 생존만을 추구하는 인간이 되며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자아, 자존감의 박살이었다. 그 곳의 모든 것이 불의했고 부당했고,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가장 모멸감을 느꼈던 순간의 예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다. 배급줄을 서다 영문도 모르고 맞았던 이유가 자신의 바로 뒷사람이 줄을 비뚤게 섰기 때문이었을 때. 작업을 나가서 만난 간부가 수용소에 오기 전 사회에서 일하던 시절의 자신을 폄하하고 비웃었을 때. 이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나도 이해했다. 아주 사소한 순간임에도 평생 따라다니며 화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다. 억울하단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모욕을 견뎌야 할 때 그 순간의 모멸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삶 전체를 돌아보면 작고 사소한 사건. 그런 것은 인간 공통의 감정이었구나.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살게 만들었다. 씻을 물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의 상처는 스스로 낫고 치아에는 충치도 거의 없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어느 공간에 갇혀 본능만이 남게 된다면 오직 성적 충동과 이기적 자아만이 인간을 움직일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본의 아니게 그 실험장의 쥐가 되어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였다. 그가 발견한 인간의 밑바닥은 그렇게 무자비하고 단순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택할 수 있었다. 자신을 흔드는 시련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였다. 프로이트의 생각과는 달리 그곳에도 사랑이, 이타심이, 존엄이 있었다. 가장 밑바닥에서도 인간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수용소 안에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헤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헛되이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강제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죽기보다 의사로서 명예로이 죽기 위해 발티푸스 병동으로 자원했던 것처럼, 굶주림에 감자를 훔친 수용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하루 굶는 체벌을 선택한 것처럼, 사람들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저자가 보았던 인간의 본성은 그것이었다.


이 가슴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로고테라피라는 새로운 심리학 이론을 창시한다. 로고란 그리스어로 의미를 뜻한다. 고통, 죄, 죽음이라는 3대 비극의 요소에도 삶이 어떻게 의미를 가지고 낙관적으로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 로고테라피는 인간의 잠재력이 고통을 성취와 실현으로, 죄를 변화의 계기로, 죽음을 삶에 책임감을 가지는 동기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의미이기 때문에, 개인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을 의미를 추적하여 찾아내어 그것이 인생을 지탱할 수 있도록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읽으며 처절한 내용과 담담한 문체의 괴리를 적응하지 못하고 몇번이나 책장을 덮었었다. 그러나 가끔 채 지워지지 못한 작가의 감정이 등장할 때면, 뒤로 갈 수록 그 고통 뿐인 현실에서 작가가 발견했던 진리와 성찰이 나를 붙잡았다. 삶에 의미가 있는지, 그저 원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세포의 생명주기에 따라 스러져가는 거대한 우주의 먼지 한톨에 지날 뿐인 인간의 존재가 아닌지, 지금의 고통과 비참한 현실을 버텨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끝은 있는지. 책을 읽으며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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