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129

기러기 - 메리 올리버 착해지지 않아도 돼.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대초원들과 깊은 숲들,산들과 강들 너머까지.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네가 있어야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그 한가운데라고. 2018. 3. 20.
오래된 서적書籍 -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2018. 3. 20.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 박노해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2018. 3. 20.
수몰지구 - 전윤호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피해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 해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꽃 피는 너의 마당이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2018. 3. 20.